2019-11-25

121217_[컬럼] “원하면 노력하고 바라면 꿈을 꿔라”-(1/2)

[컬럼] “원하면 노력하고 바라면 꿈을 꿔라”


admin cable8mm@imaso.co.kr 

1983년 창간된 마소는 필자의 IT의 인생을 함께한 오랜 친구이자 선배와 같은 존재다. 어렸을 적 마소의 독자로서 마소가 나오는 날이면 설레는 마음으로 서점에 갔던 기억이 난다. 2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은 독자에서 필자로 입장이 바뀌어 연재를 하고 있다. 2년이 채 못되는 시간이지만 마소에서 네트워크 칼럼을 연재하며 개인적으로 많은 도움이 됐던 것 같다. 몇 페이지 안 되는 이 글에 필자의 인생을 모두 적을 수는 없지만 필자가 처음 접한 IT와 지금까지의 삶, 우리가 마주한 현실 등 소주 한잔 기울이며 할 법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서로 공감해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김지웅 anton3831@naver.com | CCIE #19104. 러시아 DEKA 2005 프로젝트 및 KOICA ICT 사업과 SKT와 LG U+ 네트워크 컨설팅 및 유지보수와 망 운영 구축 등을 담당했다. 현재는 메리츠 금융그룹 데이터센터 운영 및 컨설팅 업무를 맡고 있다. 
프로그래머의 꿈
필자가 처음 컴퓨터를 접한 것은 1983년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그 당시 컴퓨터는 이름조차 생소하고 명칭도 ‘컴푸타’, ‘콤푸타’, ‘컴퓨타’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던 시절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컴퓨터를 그저 비싼 게임기 수준으로 생각했다. 필자는 과학상자나 전자 조립키트 같은 것을 워낙 좋아하던 터라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지금의 필자 인생을 바꿔 놓을 괴물(?)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괴물은 대우에서 출시한 IQ2000이라는 컴퓨터였다. IQ2000과의 만남은 필자를 프로그래머의 길로 인도했다. IQ2000은 롬팩을 삽입해 게임하던 가정용 게임기 수준의 컴퓨터였는데, 게임기로만 사용하고 버린 사람들도 있겠지만 필자처럼 호기심이 넘쳤던 사람이라면 그걸로 뭔가 하나씩은 만들어 봤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IQ2000에는 인터프리터 언어인 베이직(BASIC)이 기본적으로 설치돼 있었고 그 베이직으로 기본 제공되는 롬팩에 있는 게임 중 몇 가지를 프로그래밍해볼 수 있도록 설명서와 코드가 들어 있었다. 무거운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수십 번씩 ‘이렇게 타이핑하면 정말 게임이 만들어지나?’하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호기심이었지만 나중에는 거의 오기였다. 

거의 다 만들어 놓고 일주일간 짠 코드를 날려먹기도 여러 번. 포기를 생각하기도 여러 번. 잘 생각나지는 않지만 코드는 짜이되 코드를 뽑으면 저장되지 않았던 것 같다. ‘니블스’라는 게임을 만드는 데 3개월이 걸렸다. 필자가 만든 코드로 게임이 실제로 구동되는 것을 보니 정말 신기했다. 그 다음에는 응용도 해보고 배경화면도 바꿔봤다. 어린 필자에게는 지금까지 본 어떤 과학상자나 전자 조립키트, 조립 완구보다 흥미를 끌었다. 그 뒤의 초등학교 생활은 온통 베이직과 함께 살다시피 하면서 프로그래밍의 매력에 푹 빠져 지냈다. 

중학교에 입학한 후 본격적으로 프로그래밍 언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포트란, 파스칼, 코볼, 터보C, QUICK BASIC 등, 무슨 놈의 언어가 그리 많았는지. 개인적으로 가장 친했던 언어는 QUICK BASIC이었다. 중학교 때는 학교 전산실의 타자기와 삼성 교육용 컴퓨터로 코딩을 공부보다 더 열심히 했다. 그 당시에는 문서작성도 참 어려웠다. 금성에서 나온 하나 워드프로세서를 기억하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워드프로세서 시험을 비롯해 관공서나 회사에서 이 하나 워드프로세서와 로터스123을 다루지 못하면 문서작성은 무리라고까지 했을 때니까 말이다. 

그 후 아래아한글이라는 워드프로세서가 시장에 나와 워드프로세서 시장이 대 혁명을 맞이했다. 거기에 컴퓨터 내에서 한글을 지원해준다는 도깨비 카드니 뭐니 하는 것이 시장에 쏟아져 나오고 모뎀 그리고 멀티미디어의 혁명이라 부를 수 있는 사운드블러스터와 옥소리 카드까지, 필자에겐 가히 천국과도 같았다. 특히 필자는 모뎀을 접하면서 통신에 큰 흥미를 느꼈다. 전화비가 얼마나 나올지 생각도 못하고 띠~이~띠~띠익하는 연결음이 항상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대기업에서 하이텔이니 천리안이니 하는 것을 출시하기 전에 풀뿌리 호스트라는 것이 있었다. 가장 유명했던 호롱불이나 RBBS 등을 통해 누군가와 BBS로 서로 글을 올리고 교류했다. 컴퓨터를 통해 서로 텍스트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맘에 들었다. 

하늘소 이야기, 새롬 데이터맨 등 여러 통신접속용 애플리케이션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BBS 개발에 욕심이 생겼다. 중학생 시절 RBBS 개발자를 따라다니며 코드를 얻고자 삼고초려하기도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결국 그 개발자에게 코드를 얻게 돼 너무 기쁜 나머지 집으로 달려오다가 교통사고까지 당했다. 하지만 교통사고도 필자의 코딩 욕심은 꺾지 못했다. 병원에 누워서까지 코딩 작업을 했다. “퇴원하기 전에 완성해야지”하면서 말이다. 퇴원 후 RBBS 소스를 참조해 파스칼을 가지고 ‘아침 BBS’라는 것을 만들었다. 공개 프로그램을 내놓고 모뎀을 듀얼로 장착해 직접 만든 BBS를 운영했다. 그때는 플래시 같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ANSI CODE라는 것을 가지고 BBS를 치장했다. BBS에 접속하면 메인화면에서 나타나는 현란한 그래픽 애니메이션이 모두 코딩으로 만들어졌다면 지금 독자들은 믿을까? 

1990년대 초, 하드웨어를 모르고 어떻게 프로그래밍을 할 수 있느냐고 생각해 대학교 전공과목을 전산과가 아닌 전자과로 선택했다. 어쨌든 프로그래머의 꿈을 펼치며 게임제작 회사에 입사해 처음으로 상용 프로그램을 만들어 프로그래밍도 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쯤 군대에 가게 됐다. 
프로그래머의 꿈을 버리다
DOS나 슬랙웨어 그리고 윈도우 3.1을 마지막으로 군에 입대했다. 제대 후 세상에 나오니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전산 관련 자격증이 없었던 관계로 통신이나 행정 쪽 보직을 얻지 못했던 필자는 머릿속이 완전히 포맷된 상태였다. 뭘 해서 먹고 살지? 고민만 깊어져갔다. 게다가 필자가 군을 제대한지 얼마 후에 IMF가 터졌다. 그 당시만 해도 한국의 IT 기술은 대부분 선진국에 의존하고 있을 때라 파장이 더 컸다. 

그래도 국내 프로그래머로서 어느 정도 자부심이 있었던 필자는 프로그래머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재도전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어렵게 제품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으면 대기업이 제품을 그대로 카피해 더 좋은 제품으로 포장해 상용화시키는 일이 반복되는 것을 보며 끝내 프로그래머로서의 길을 포기하고 말았다. 개발자들이 풀뿌리 프로그래머라는 이름표를 붙인 채 살아가야 했던 암울한 시절이었다. 

기회가 온 것은 새로운 정부가 시작된 1998년 2월부터였다. 이때 한국의 IT 시장이 큰 호황기를 맞게 된다. 갑자기 수많은 벤처회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대기업보다 벤처회사 직원이 결혼 대상 1순위라고 할 정도로 IT 업종 종사자들이 좋은 대우를 받았다. 생소한 IT 관련 학원들이 생겨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IT 업종으로 전환하거나 IT의 꿈을 품고 도전하게 된다. 세계수준의 IT 강국이라는 한국의 위상이 만들어진 것도 이때였다. 그러나 그런 호황 속에서도 많은 신생 벤처들이 비리에 시달렸고 벤처 거품이 꺼지면서 하루에도 수십, 수백개의 벤처들이 문을 닫게 됐다. 연일 TV에 벤처 대표의 구속 뉴스와 IT 호황기를 틈탄 한탕주의에 대한 뉴스들이 쏟아지고 IT 업종에 종사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길거리로 나오게 됐다. IT 인력은 많은데 그 인력들이 갈 곳이 없어진 것이다. 

필자 또한 그 당시 시스템 엔지니어로 벤처를 전전하던 중 한국 IT에 환멸을 느껴 한국의 모 건설사와 미국의 석유회사가 해외 현지에 설립한 법인 회사에 IT 엔지니어로 근무하게 됐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좀더 나은 연봉과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도 있었다. 
개는 밥을 주는 사람을 따르고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따른다
계란 한 판에 계란 1개를 더한 나이에 처음 외국 땅을 밟았다. 한국에서 경험한 IT 업계와는 달라도 너무 달라 적응이 힘들었다. 평균 기온이 영하 40도이며, 도시와 1,000km나 떨어진 곳에 인터넷과 전화 그리고 서버들을 구축하고 운영하는 것이 필자의 임무였다. 앞이 깜깜했다. 말도 통하지 않는 타지에서 개발, 구축, 설계, 운영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을 로컬 업체와 함께 처음부터 만들어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악조건이 산재해 불가능하다고까지 생각됐고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도 많이 했다. 

그렇게 많은 고민을 하는 필자에게 큰 힘이 돼 준 사람들이 있었다. 시간이 흐른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이 필자에게 준 것은 “너는 할 수 있다”라는 믿음이었다.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개는 밥을 주는 사람을 따르고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따른다.” 

 

[러시아 SI 업체 ComPlulink CEO 세르게이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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