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01

180711_폐지 할머니와의 진한 우정

폐지 할머니와의 진한 우정


2018년 8월호 
 

늘 그렇듯 아빠와 운동을 나간 어느 새벽이었다. 바스락바스락. 길거리에 버려진 쓰레기봉투 뒤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길고양이인가 했는데 가까이 가보니 파지를 줍고 계시는 동네 할머니였다. 쓰레기차가 다녀가기 전에 한 장이라도 더 주우려고 새벽같이 나오신 모양이었다. 

앉았다 일어났다를 여러 번 반복하며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할머니의 손길이 분주해 보였다. 연로한 몸으로 열심히 파지를 주워 구르마에 차곡차곡 쌓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니 문득 그리운 얼굴이 떠올랐다. 

예전에 다니던 회사 주변 골목에서도 파지 줍는 할머니를 자주 보곤 했다. 할머니와의 첫 만남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아무리 많이 주워봤자 큰돈이 되지 않건만 그마저도 경쟁이 치열한지 할머니는 사무실 안까지 들어와 파지를 챙겨가곤 했다. 

그날도 할머니가 사무실로 들어와 바쁘게 일하고 있는 나에게 혹시 버릴 종이 없냐고 물으셨다. 그날따라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던 과장님은 할머니를 성가시다고 느꼈는지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대뜸 “할머니, 여기 할머니가 들어올 곳이 아니에요. 일하는 사무실이니까 당장 나가세요!” 하고 윽박을 질렀다. 

나도 할머니가 귀찮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어른을 함부로 대하는 과장님이 너무 한다 싶었다. 아들뻘 되는 과장님에게 할머니는 연신 죄송하다며 허리 굽혀 사과하고는 황급히 사무실을 나가셨다. 축 처진 할머니의 뒷모습이 신경 쓰여하던 일을 멈추고 재빨리 뒤쫓아 나갔다. 

“할머니, 죄송해요. 워낙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셔서 예민해서 그런 거니까 맘에 담아두지 마세요. 제가 종이 모아둘 테니까 앞으로는 오후에 오세요. 오후에는 상사 분들이 외근을 나가 대부분 안계시거든요.” 

괜찮으니 괜히 자기 때문에 혼나지 말고 얼른 들어가라고 하시는 할머니를 뒤로하고 나는 서둘러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날부터 이면지를 한곳에 모아두기 시작했다. 이면지가 한 장 한 장 쌓일수록 기뻐하는 할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할머니가 혹시 또 오전에 오셔서 따가운 눈총을 받을까 봐 걱정이 되었다. 

꼭 오후에 오셔서 마음 다치시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오후 3시쯤 바쁜 업무를 어느 정도 마무리하고 물 한잔 마시려고 자리에서 일어선 순간, 사무실 문 뒤에서 빠끔히 얼굴을 내밀고 있는 할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재빨리 달려 나가 “왜 거기서 그러고 계세요. 이 시간에는 그냥 들어오셔도 되는데요”하고 인사했다. 

“나 때문에 아가씨가 그 양반들한테 혼날까 봐 걱정이 돼서 들어올 수가 있어야지” 하며 미안해하는 할머니에게 나는 모아둔 이면지를 서둘러 챙겨 드렸다. 

할머니와 나의 비밀 작전이 시작된 건 그날부터였다. 한산한 오후, 할머니는 사무실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 내가 모아둔 종이를 구르마에 실어 가셨다. 업무가 많지 않은 날에는 가끔씩 할머니와 차 한 잔을 마시기도 했다. 상사들의 눈을 피해 할머니와 만나는 시간은 어느덧 일상 속의 작은 활력이 되었다. 직장 생활이 힘들어도 말할 데가 없어 답답했던 마음을 할머니와 대화하며 위로받은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아무도 모르게 만나야 했다. 회사에 파지 줍는 사람들을 들이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던 터라 마음 아파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상사들이 있을 때는 사무실 앞에서 할머니를 보더라도 두 눈 질끈 감고 모른 척했다. 

그런 나의 행동이 섭섭하셨을 텐데도 할머니는 다 이해한다 며 종이를 모아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가끔 말동무까지 해주니 이렇게 고마울 데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할머니와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하며 우정을 쌓다 보니 계절은 어느덧 한철을 지나 겨울 한복판에 서 있었다. 그 무렵부터 할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사무실에도 오지 않으셨고, 회사 근처 어디에서도 할머니를 볼 수 없었다. 

추운 날씨에 파지를 주우러 다니시다가 혹여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지 걱정스러워 무거운 마음으로 하루하루 보내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연주 씨, 손님이 찾아 오셨어요.” 고개를 들자 할아버지 한 분이 서 계셨다. 일전에 몇 번 뵌 적이 있는 할머니의 남편이셨다. 할아버지를 보자마자 할머니의 안부부터 여쭈었다. 

“할머니가 요즘 통 안 보이시는데 혹시 집에 무슨 일이 생겼나요?” 그러자 할아버지는 “얼마 전 파지 담은 리어카를 끌고 가다가 빙판길에서 넘어져 입원했지 뭐예요. 집사람이 아가씨한테 자기가 보내서 왔다고 하면 모아둔 종이를 줄 거라고 해서 왔어요. 그리고 혹시 아가씨가 자기 소식을 궁금해할지도 모른다면서 안부 전해달라고도 했고요” 하고 대답했다. 

병문안을 가보려고 할머니가 어느 병원에 입원하셨는지 여쭤보았지만 할아버지는 다음 주면 퇴원하니 그때 같이 오겠다고 하셨다. 대신 할머니의 연락처를 알려주셔서 곧바로 할머니와 통화 할 수 있었다. 늙은이 아픈 게 뭐 대수라고 전화까지 주었냐며 고맙다고 하시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니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커졌다. 

사무실에 할머니가 금방이라도 짠하고 나타날 것 같아 오후가 되면 괜히 고개를 들어 문 쪽을 보는 게 습관이 되었다. 

간절한 기다림 끝에 할아버지가 약속했던 일주일을 훌쩍 지나 거의 한 달만에 사무실로 찾아온 할머니. 그사이 많이 야윈 할머니 손에는 컵라면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아가씨, 혹시 점심 먹었어? 나 오늘 한 끼도 못 먹었는데 물 좀 부어줄 수 있을까? 하나는 아가씨 먹으라고 사왔어.” 추운 겨울날 컵라면을 길에서 드시려는 것 같아 “저도 아직 점심 못 먹었는데 같이 먹어요. 할머니가 라면 사주셨으니까 디저트는 제가 대접할게요!” 하며 할머니를 탕비실로 모셨다. 

우리는 따끈한 컵라면과 내가 집에서 싸온 과일을 먹으며 그동안 쌓아두었던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놨다. “퇴원 후에도 우리 집 양반이 무리하지 말라고 해서 집에 있었는데 아가씨가 눈앞에 어른거리더라고. 좋은 친구가 생겨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 괜찮으면 언제 한번 우리 집에 안 올래? 내가 따순 밥 한 끼 해먹이고 싶은데…. 너무 주책인가?” 

나는 할머니의 초대에 기꺼이 응했다. 할머니는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피자를 시켜줄까 물으셨지만 평소에 할머니가 드시는 대로 먹자고 했다. 여러 종류의 김치와 장아찌, 구운 김, 두부로 차린 할머니표 밥상은 두고두고 생각나는 맛있는 한 끼였다. 

몇 년 후, 회사를 퇴사한 뒤에도 할머니와 종종 연락하고 지냈지만 다른 직장을 구하고 나서부터는 새로운 일에 적응하느라 자연스레 연락이 끊겼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아빠와 함께 나선 운동길에 파지 줍는 동네 할머니를 보자 오래전 따뜻한 추억을 나눈 할머니가 몹시 그리워졌다. 다행히 휴대전화에 남아 

있는 할머니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지만 없는 번호라는 차가운 기계음이 대신 전화를 받았다. 


할머니는 지금쯤 누구와 말동무를 하며 지내고 계실까. 나 말고 또 다른 새로운 친구를 사귀셨을까. 진정한 친구가 되는 데 나이는 결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준 할머니를 다시 만난다면 하고 싶은 말들이 산더미다. 아쉽지만 좋은 벗을 만나 할머니가 즐겁게 지내고 계시길 바라는 것으로 안부 인사를 대신 

해야겠다. 



조연주 

연분홍 함박눈이 쏟아지던 봄날, 경기도 남양주에서 태어나 지금껏 살고 있는 30대 중반 여성입니다. 13년간의 직장생활을 2년 전에 정리하고 현재는 하루 종일 음악을 듣고 글을 쓰는 여유로운 삶을 즐기는 중입니다. 폐지 할머니를 떠올리니 더운 여름날 건강히 지내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 

‘인생은 한 편의 드라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세요. 수없이 겪은 우여곡절, 기가 막힌 인연 등 우리 인생이 바로 한 편의 소설이고, 드라마입니다. 때론 굴곡졌던, 때론 햇빛처럼 찬란했던 우리의 삶은 지쳐 쓰러져 있는 누군가를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될 것입니다. ‘파랑새의 희망수기’는 삶의 희망을 찾아 날갯짓하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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