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09

분당 차병원 조경기 교수, 몽골 뇌종양 환자에 나눔 의료 실천_220109_[인간탐구] 아주대 병원 신경외과 조경기 박사_010425

* 조경기 박사님덕에 수술 잘봤고 15년 넘게 아이셋을 키우며. 건강하게 잘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건강하십시요.



[인간탐구] 아주대 병원 신경외과 조경기 박사(上)

 

산에 홀리고 일에 취한 '중독자' 

의사 조경기(51) 박사에겐 두가지 병이 있다. 일 중독과 산(山) 중독이다. 증세가 심각하다. 남의 병은 잘 고쳐도 자기 병은 좀처럼 치유가 안된다. 워낙 뿌리가 깊다. 

아주대학병원 신경외과 과장인 그는 정시 퇴근이란 걸 모른다. 남들이 다 퇴근한 뒤에도 혼자 연구실에서 꾸물대며 나오지 않는다. 

새벽길 귀가는 기본이다. 환자 보랴, 제자 가르치랴, 각종 학술모임만으로도 벅찰텐데, 매년 연구논문까지 꾸준히 쏟아낸다. 그야말로 초인이다. 10여년전엔 단 2년3개월만에 논문 18편을 발표한 적도 있는 경이로운 연구중독자이니 차라리 이 정도는 약과인지 모른다. 

일 중독도 문제지만 산 중독도 못지 않다. 환자이거나 같은 의료계 종사자가 아니면 좀처럼 사석에서 보기 힘든 그를 유일하게 꾀어낼 수 있는 사람은 산악인들이다. 

요즘도 한달에 두번쯤은 인수봉 암벽등반에 나선다. 한밤중에 일을 하다가도 창밖에 보름달만 밝았다 하면 몽유병 환자처럼 병원 뒷산에라도 오르는 의사다. 

산에 홀렸다. 너무 연구실에만 틀어박혀 병이라도 날 것 같은 그를 그나마 산이라도 그렇게 데려가는 게 오히려 고맙다. 진료실 겸 연구실 벽엔 등반 사진도 붙어 있다. 

의사가 아닌 산사나이 조경기의 터프한 모습이다. 이미 소문을 다 듣고 갔는데, 산 얘기를 꺼내자 펄쩍 뛴다.

 "산에 오르면서도 환자들 생각하면 미안하죠" 

 "환자들에게 미안하게 왜 그러세요. 저는 열심히 일만 하는 사람입니다. 산은 그냥 취미삼아 조금씩 다니는 것뿐입니다. 비록 개인적인 주말시간을 이용해 이따금 다니는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 시간까지 환자들을 위해 쓰는 게 옳지 않나 늘 마음에 걸립니다. 저만 아니라 의사들 누구나 스트레스를 이기기 위해 갖는 취미 정도로만 봐 주세요.

" 주말에 쉬는 것조차 환자들에게 미안해 못견디는 의사. 취미라곤 하지만 누구나 그처럼 목숨 걸고 도전하진 않는다. 몇해전 마나슬루봉을 비롯해 '죽음의 산' K2에도 올랐던 그다. 

사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돌아왔다. 요즘도 언제 또다시 있을지 모를 '재기전'을 위해 꾸준히 체력을 단련하고 있다. 매일 새벽 5시 20분이면 기상, 일찌감치 병원에 나가 1시간 가량 운동을 한 뒤 일중독자의 일과를 시작한다. 

속사정 모르는 사람들은 K2 등반때 팀닥터 자격으로만 합류한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등반대를 이끌었던 엄홍길씨를 비롯, 대원들 역시 처음엔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곱게 베이스캠프에만 있을 줄 알았던 그가 부득부득 자신도 '클라이머'(climber)라고 우기며 정상까지 가겠다고 나섰다. 

실없는 농담 정도로만 알고 대원들끼리 떠나버리자 급기야 혼자 현지 시장을 돌아다니며 장비를 구한 뒤 단독 등반에 나섰다. 자랑스런 등반대의 일거수일투족이 한국 언론에 시시각각 보도되며 박수를 받을 때, 그는 그 뒤에서 외톨이로 일대 모험을 벌이고 있었다. 


나중엔 대원들도 이를 알게 됐지만, "아무리 위험하다고 말려봐야 들을 사람이 아니다"는 것을 알고서야 말리기를 포기했다. 결국 7,500m고지까지 밟고 내려왔다. 자칫하면 빙하속에 사라질 수도 있었던, 당돌한 사투였다. 그러고도 후회는커녕, 고지를 눈 앞에 둔 채 악천후로 포기했다는 미련으로 아직도 이를 갈고 있다. 


 "나중에 가족들이 놀라지 않았냐구요? 그럴까봐 전혀 그 얘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걱정도 걱정이지만 뭣보다 다음번 등정때 혹시 지장이 있을까봐 계속 숨기고 있습니다. 아직도 집사람은 제가 베이스 캠프에만 얌전히 있다가 온 줄 압니다." 

위험한 운동만 골라서 하는 산사나이

 

세상에 위험하다는 운동이란 운동은 다 해보았다. 공중에서 낙하하고, 바다로 뛰어들고, 그런 등등의 스포츠다. 하지만 등반만큼 그를 강력히 사로잡은 건 없다. 왜 그렇게까지 위험에 뛰어드는가를 물어보면 엉뚱한 수술 얘기가 다시 튀어나온다.

 "수술과 등반은 서로 통하는 점이 있습니다. 생명이 왔다 갔다하는 아주 극한 상황에 나를 던져놓고 마침내 그 많은 위험과 어려움을 잘 참고 견뎌서 성공할 때, 큰 희열과 보람을 느낍니다. 뇌수술은 아침에 시작하면 오후 언제쯤 끝날지 모르는, 대단히 힘든 일입니다. 

열몇시간씩 그렇게 극도로 정신을 쏟다 보면 도중에 너무나 지쳐서 당장이라도 모든 동작을 정지하고 좀 쉬었으면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꼭 암벽 한가운데에 탈진한 채 매달려 있을 때 느끼는 기분과 똑같습니다. 그런 고통 하나하나를 어떻게든 참고 이겨나가는 과정 자체가 제게 만족감을 줍니다.

" 수술실 안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조경기 박사는 국내 의학계가 인정하는 뇌종양과 척추종양 수술의 권위자다. 실력은 물론 수술횟수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거의 매일 수술 스케줄이 잡혀 있다. 그것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어지는 대수술이 보통이다. 

수술이 있는 날은 하루종일 온 몸이며 정신이 바늘끝처럼 예민해진다. 혹시라도 손이 떨릴까봐 수술당일 아침엔 절대 무거운 것을 들지 않는다. 특히 뇌수술 환자들은 대부분 생명이 위태로운 심각한 상태다. 

극도의 긴장속에서 10여시간 수술에 몰두하다 보면 지치는 건 환자뿐 아니라 집도하는 의사도 마찬가지다. 웬만큼 강하지 않으면 탈진하기 십상이다. 철인체력으로 소문난 그도 어떨 땐 수술중 피로를 이기지 못해 잠시 다른 스태프에게 몇가지 처치를 지시한 뒤 한쪽 구석에서 10분쯤 급히 눈을 붙이고 일어나 다시 수술대에 돌아올 정도다. 

의료사고를 막자면 궁한대로 그 수밖에 없다. 한번 메스를 들면 옆자리의 간호사가 바뀌어도 눈치채지 못한다.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일부러 틀어놓은 음악소리가 들리는지 안 들리는지, 환자외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몸도 쉴 틈이 없다. 

손은 손대로 수술도구를 쥐고 있고, 발은 발대로 특수 설계된 의자의 버튼을 수시로 밟아대며 주변 장비를 조작하느라 바쁘다. 

눈은 수술 내내 밝은 조명속에서 현미경을 들여다보느라 거의 핏발이 설 지경, 그 현미경의 위치를 조정할땐 입까지도 동원된다. 입으로 물어 움직이는 것이다.


극도의 긴장 요하는 수술, 체력으로 버텨 


정신을 놓치면 큰 일이다. 이것은 생명의 뇌관을 건드리는 일이다. 뇌혈관의 크기는 고작 직경 1mm정도. 그 미세한 혈관을 자르고 접합하면서 둘레로 여덟 차례 꿰매기, 그의 수술은 대부분 그런 식이다. 실은 가늘다못해 육안으론 보이지도 않는다. 

머리카락 굵기의 10분의 1에 불과하다. 한번 꿰매다가 잃어버리면 다시 찾지도 못한다. 사고의 위험은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단 2-3mm만 오차가 있어도 환자는 그 즉시 반신불수가 되거나 다시는 세상을 보지 못한다. 죽거나 식물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신경외과 의사들의 수명은 짧다. 환자의 목숨은 그리도 잘 늘려주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제 명대로 못 산다. 

의사가 된 건 자신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어렸을 때 남산도서관장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도서관 책더미속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 가운데 슈바이처 전기가 있었다.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치료하며 살겠다고 마음먹었다. 산은 언제나 가까이 있었다. 코흘리개적부터 동네 뒷산 범바위를 오르내리며 자랐다. 

아버지부터가 산악지역 출신이었다. 부친의 고향은 이북 해산진. 8ㆍ15해방때 가족이 남한으로 내려왔다. 그의 이름도 월남한 뒤 처음 서울(京)에 터(基)를 잡고 낳은 아들이라고 해서 부친이 지은 것이다. 

1969년 연세대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공부 하나만으로도 벅찬 의대생 신분, 그러나 의대 산악부에 들어간 뒤 오히려 본격적인 산타기에 더 열을 올렸다. 전국의 산을 찾아 암벽, 빙벽을 오르내렸다. 숫기없던 성격이 서서히 바뀌었다. 그 흔한 축제나 데이트도 하지 않았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산에 갔다. 

산악부원 중에서도 산 욕심이 유별났다. 고려대 산악반에 이어 두 번째로 백두대간 종주에 성공하는 기록도 세웠다. 무모하기론 그때부터 소문이 나 있었다. 아직 제대로 길도 나지 않은 그 험난한 고산준령을 넘어보자고 학생들을 모아놓고, 장비라고 가져간 것은 고작 5만분의 1 지도와 콤파스.


"지도 읽는 법도 모르면서 무슨 종주냐"는 핀잔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밀고 나갔다. 산악반을 두 팀으로 나눠 양 끝점에서 각각 출발시킨 뒤 15일후 그 중간지점인 대관령에서 도킹한다는 계획이었다. 얼마나 무리한 일인지,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았다. 


부르튼 발 때문에 절뚝거리는 학생들, 한 화전민촌을 지날땐 제발 그곳에서 자고 가자는 반원들의 하소연도 뿌리친 채 강행군을 계속하다가 결국 그들이 흘리는 눈물을 보고 뒤늦게 가슴 아팠던 적도 있다. 


그래도 멈추진 않았다. 계획대로 15일만에 도킹. 모두가 '독하다'고 했다. 


행여 산 때문에 학업을 망칠까봐 부모님은 내내 좌불안석이었다. 언젠가 암벽을 타다가 다쳤을땐 집에서 몰래 치료하다가 아버지께 들켜 크게 혼이 났다. 한번만 더 산에 가면 다리를 부러뜨려놓겠다는 고함까지 들었다. 


그러나 부친은 끝내 아들의 '버릇'을 고쳐놓지 못하고 가셨다. 심지어 장래가 달린 의사면허시험 2주일전에도 산으로 달아났다가 돌아온 아들이었다. 산만 아니면 나무랄 게 없는 효자였다.



신경외과는 의료분야중 3D업종으로 취급 


대학교 1학년때 척추종양수술을 받았다. 지난 K2등반때도 남몰래 허리통증을 겪었을 만큼 아직도 후유증이 있는 큰 수술이었다. 처음엔 까닭없이 한쪽 다리가 아파오다가 나중엔 걸음도 떼지 못하는 정도가 됐다. 


병원에 갔더니 척추종양이라고 했다. 자신과 비슷한 증세로 1주일전 입원했다는 한 환자는 수술후 사지마비가 된 채 누워 있었다. 


다행히도 무사히 수술이 끝난 그는, 그러나 그 몸으로 또다시 산행을 다닌 것이다. 하고많은 과목중에서도 특히 어렵다는 신경외과를 택한 것도 그런 자신의 병력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신경외과는 누구나 원한다고 다 될 수도 없는, 당시 의대성적 상위권 중에서도 최상위권에게만 기회가 주어지는 선망의 분야였다. 


인체를 다루는 의료분야중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겠지만, 그중에서도 인간의 생명을 지탱하는 최고의 중추를 다룬다는 자부심이 누구보다 컸다. 3D 취급을 받는 요즘에도 그것은 여전하다. <계속> 


정영주 자유기고가 mars10@chollian.net 

김명원 사진부 기자 kmx@hk.co.kr 

입력시간 2001/04/25 19:08


[인간탐구] 아주대 병원 신경외과 조경기 박사(下)

 

"일중독에서 나를 지켜준건 산" 

화려한 생활은 안중에 없었다. 평생 시골의사를 꿈꾸며 지방도시 원주의 한 병원 인턴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1년만에 쫓겨났다. 사건이 있었다. 당시 진료실에선 환자에게 쓸 거즈도 모자라 난리인데 병원에선 여윳돈이 생기자 진료환경을 개선하는 대신 새 테니스장을 만들기에 바빴다. 어느날 밤 동료들과 술을 마시다 폭발해버렸다. 동료 10명과 함께 갓 단장한 테니스장을 발로 마구 짓밟아놓았다. 

다음날 병원이 발칵 뒤집혔다. 주모자라는 이유로 1순위로 잘렸다. 시골의 일반의사로 살겠다던 소박한 계획은 그것으로 끝났다.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에서 전공의 과정을 마치는 동안 뜻밖의 행운을 만났다. 당시 전공의 필수과정인 무의촌 진료 근무지로 지리산 뱀사골을 배정받은 것. 워낙 깊은 산골이라 찾아오는 환자도 없었다. 한국인 최초의 에베레스트 등정을 꿈꾼 것도 그때였다. 

매일 10Km씩 구보를 하는 한편 환자가 없는 날은 텅 빈 보건소의 문을 닫아걸고 지리산을 오르내렸다. 의사 대신 전문산악인이 되려고 했다. 의사면허가 있으니 그건 나중에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와중에 고상돈씨의 에베레스트 등정 소식을 방송에서 들었다. 선수를 빼앗겼다고 가슴을 쳤다. 낙담한 채 산악인의 꿈을 포기했다.


미국체류 2년3개월동안 논문 18편 

발표 그 후 진료와 공부외엔 한 눈을 팔지 않았다. 1980년 국립서울병원 신경외과 과장으로 근무하면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데 이어 연세대 의대 교수로 있던 1985년 미국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대학 뇌종양연구소 연구원으로 건너갔다. 

거기서 그는 한국 '일중독자'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왔다. 2년3개월의 짧은 체류기간 동안 무려 18편의 논문을 쏟아낸 것이다. 석달에 두편 꼴인데, 그것도 모두 국제의학계에 보고된 논문들이다. 쉴틈없이 현장을 찾아다니며 파고든 결과다. 심지어 귀국전날에도 실험실에 있었다. 

귀국이삿짐을 꾸리는 일마저 부인에게 맡기고 자신은 논문만 붙들고 있었다. 그 일로 지금까지 약점이 잡혀있다. 이후 전주 예수병원 신경외과 과장, 연세대 의대 교수를 거친 뒤 1994년 현재의 병원으로 적을 옮겼다. 

그간 그가 의료계에서 세운 공은 크고도 많다. 1987년 이후 각 일간지 의학면엔 수시로 그의 이름이 올랐다. 수술이 아닌 주사침 흡입으로 디스크를 치료하는 새 수술법 개발, 수술부위를 절제하지 않고 간단한 방사선 캡슐로 치료하는 새 뇌수술법 개발과 뒤이은 첨단 뇌내시경 도입 등. 가장 최근작으로는 '뇌종양 경계 표식자'라는 것을 내놓아 주목을 받았다. 

뇌종양의 완전제거를 가능하게 만든, 일종의 아이디어 수술장비다. 현재도 3년째 파킨슨씨병 환자들을 위한 연구중이다. 이 병의 주요인자인 도파민을 체내에서 직접 생성할 수 있는 유전자 개발 연구로 새로운 기대를 모으고 있다.

   

"가끔은 '꼭 생명을 살리는 것만이 최선인가'하는 물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최근 대한의협에서도 안락사, 뇌사, 낙태 등에 대한 법적 공론화 움직임을 보여 논란이 됐지만, 아마도 의사라면 누구나 고민하는 문제일겁니다. 

병원에 있다보면 뇌출혈로 응급실에 실려온 환자의 가족들이 처음엔 무조건 '살려달라'고 애원합니다. 하지만 막상 수술로 생명을 건지고도 다시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 소위 '식물인간'이 되면 그땐 수술로 살려놓은 것 자체를 후회합니다. 나중엔 '차라리 그때 왜 죽게 놔두지 않았냐'고 저까지 원망합니다. 

그들이 겪는 고통이란 말할 수 없습니다. 현실적인 것만 해도, 당장 한달에 200만원이 넘는 간병인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으며, 가족의 생계는 또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런데 얼마전 모 병원에선 뇌손상 환자를 수술한 뒤 의사가 가족들의 형편을 고려해 퇴원시켰다가 살인죄로 기소돼 지금도 법정 투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안락사에 대해선 뭣보다 환자와 보호자 자신이 너무도 간절히 그것을 원합니다. 아무리 의사로서의 윤리와 책임이 중하다 해도, 결국 병원비를 내거나 고통을 받는 건 그들인데, 현실적으로 아무 도움도 안되는 제3자인 우리가 무조건 살리기만 한다고 능사인가,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회의가 듭니다. 개인적으로도 환자와 보호자의 결정을 존중해주는 것이 온당하리란 생각입니다." 

그동안 숱한 죽음도 목격했다. 혼수상태로 실려와 손을 써보기도 전에 숨을 거두는 환자, 1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은 뒤 단 몇 달이라도 더 생명을 늘리기 위해 수술대에 오르는 환자. 

그 힘겨운 싸움 끝에 결국 환자가 떠나버리면 의사 역시 심한 속앓이를 한다. 지난 2월엔 특히 그랬다. 어떻게든 살려보려던 한 환자가 어려운 수술에도 불구하고 끝내 숨을 거두자 너무도 허망해 하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생전 처음으로 평일중 휴가를 얻어 제주도로 떠났다. 한라산 설벽에서 자신과 또다른 싸움을 했다. 이틀만에 겨우 마음을 추스리고 돌아와 신문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그와 함께 등반했던 제주도 학생 3명이 눈사태로 죽었다는 기사가 난 것이다. 하늘이 그를 살려준 뜻이 무엇일까?


산에 오르며 자신과의 싸움 수없이 반복 

자신조차 '뇌종양'에 걸리기 딱 좋은 그 스트레스를 그나마 견뎌내고 있는 건 산 덕분이다. 산조차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지만, 그 고통속에서 그는 더 강해진다. 

5년전부터는 더 큰 위험에 뛰어들었다. 1996년 마나슬루봉에 오른데 이어 지난해엔 K2에 도전했다. 대외적으로는 팀닥터였지만, 사실상 자신과의 대싸움을 치른 산악인이었다. 

잔뜩 긴장한 채 도전한 마나슬루봉 등정은 예상보다 순탄했다. 해외원정은 처음이었지만 심한 고소증으로 고생한 것 외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평소 단련시킨 체력덕을 톡톡히 봤다. 해발 7,000m까지 밟은 뒤 정상에는 엄홍길씨만 성공, 계속되는 막판 폭풍 때문에 할 수 없이 전 대원이 철수했다. 

돌아오고보니 약이 올랐다. 내내 별렀던 기회는 4년 뒤에 찾아왔다. 마침 의료계 파업기간중 K2 등반대의 팀닥터 제의를 받았다. 장장 50일간의 대장정. 가기전 몰래 유서를 준비했다. 국내에선 받아주는 보험사조차 없어 한 외국 생명보험에 가입해두었다. 

그 서류를 유서와 함께 봉투에 넣어 연구실 책상위에 두고 나왔다. 가족에겐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책상위의 서류를 어디어디에 갖다주라'고 출국전 한 간호사에게 언질을 줬다. 

구급의료품들과 함께 그가 빠짐없이 챙기는 '필수상비약' 한가지는 술. 원래가 애주가이기도 하지만, 등반중의 술은 약처럼 특별하다. 야영중 추위와 적막감을 견디게 해준다. 술 반입이 금지된 파키스탄에 들어갈 땐 비상수송작전까지 펼쳤다. 공항 검색원들에게 들킬까봐 의약품 상자속에다 몰래 술을 숨겼다. 다행히 무사통과. 항간엔 '링거 병에 넣어온 술도 봤다'는 소문도 있다. 

K2는 해발 8,611m. 자신만 남겨두고 떠난 대원들 뒤에서 단독등반을 결심했다. 7,500m의 제4캠프까지 올라가는 5일동안 홀로 빙하에 내던져져 있었다. 등정은 생각보다 엄청나게 어렵고 고통스러웠다. 허술한 인스턴트 밥이나 수프 따위로 대충 허기를 때웠다. 

그 죽음의 산을 구태여 찾아올라온 자신이 미쳤다고도 느꼈다. 이따금 그를 찾는 인기척이라곤 '환자가 생겼으니 치료해달라'는 무전기속의 요청뿐이었다.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보다 자기 자신이었다. 제2캠프에선 두 번이나 죽을 뻔 했다. 

갑자기 머리위로 바위가 굴러떨어지는가 하면 자일을 고정시킨 바위가 통째로 부서져 내릴 상황이 벌어져 행여 뒤따라 오던 사람이 변을 당할까봐 온 몸으로 자일을 버티고 있었다. 오도가도 못한 채 탈진 직전까지 허공에 매달려 있던 그를 무전기 연락을 받은 동료가 급히 달려와 구해냈다.


"거의 신들린 사람처럼 산에 올랐죠"

 


"정말 무모한 짓이었지요. 거의 신 들린 사람처럼 올랐습니다. 그렇게까지 고생을 하고도 결국 악천후 때문에 정상을 보지 못하고 온 게 너무도 아쉽습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다음번엔 꼭 해내고 말겁니다." 


아는 거라곤 오로지 산과 병원뿐, 그외엔 헛점도 많은 의사다. 수원에 온지 몇해가 지나도록 병원 뒷산은 알아도 수원역이 어딘지, 가까운 은행이 어딘지 모른다. 가족들로부터 '빵점'을 맞은 지도 오래다. 평일의 심야 귀가는 기본이고 주말은 주말대로 배낭째 행방불명이다. 


돈에 대해선 더 어둡다. 얼마전엔 휴대폰 요금이 체납됐다며 전화를 끊겠다는 통신회사의 '협박'까지 들었다. 남들은 얼마나 여유있게 사는지, 자기 통장에 돈이 있는지 어떤지도 모르고 산다. 


그러다가 얼마전엔 정말 속 터지는 일이 있었다. 지인중 하나가 최근 100만원짜리 쌍꺼풀 수술을 받았다는 얘기를 우연히 듣고 깜짝 놀랐다. 단 30분짜리 쌍꺼풀 수술비가 100만원, 자신은 생명을 건 10여시간짜리 대수술을 하고도 고작 50만원을 받을까 말까라니 약이 바짝 올랐다. 


그 참에 개업을 해버릴까도 생각했다. 옛날부터 주윗사람들이 더 종용하던 일이었다. 하지만 잠깐뿐이다. 개업하면 지금보다 10배, 20배 수입이 올라갈 것은 그도 뻔히 알지만, 어릴적 책에서 읽었던 슈바이처가 또다시 발목을 잡는다. 


그 대신 그는 요즘 색다른 싸움을 준비하고 있다. 다른 곳에서 추간판제거수술을 받고도 상태가 악화돼 찾아온 한 만성골수염환자를 3차례의 대수술 끝에 어렵사리 호전시켜놓았다. 


그런데 그 과정에 쓰인 항생제 비용에 대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측이 그 일부를 인정해주지 않겠다고 나온 것이다. 대략 1,000만원에 해당한다. 전후상황을 설명하자면 너무 복잡하지만, 한마디로 해당 치료법에 대한 전문적 검토없이 진행된 평가 때문에 생긴 오류로 그는 보고 있다. 


가뜩이나 진료비 부당청구 문제로 의사들에 대한 시선도 곱지 않고, 상대가 상대니만큼 주위에선 승산이 없을거라며 말리기도 하지만, 그는 '정 말리면 사표까지 쓰겠다'며 소송에 나섰다. 격려는 커녕, 진정한 의사들의 땀까지 마구잡이로 평가절하하는 행정이 그에겐 서운하다못해 화가 난다. 


처음엔 난색을 표하던 병원측도 결국 그의 소송을 지원하고 있다.



의사생활은 지금부터가 진짜 하이라이트 


나이는 거꾸로 먹어간다. 체력은 아직도 20~30대 수준이다. 수술중 음악을 틀어놓는 것은 조 박사의 트레이드 마크중 하나. 예전엔 클래식만 고집했으나 요즘은 발라드나 트롯까지 섭렵하고 있다. 


도무지 정신없게만 보인다던 에어로빅까지 이젠 그의 새벽운동 코스중 최고의 시간이 돼 있다. 한번이라도 거르면 종일 기분이 찌뿌둥해지는 이상한 금단현상까지 생겼다고 한다. 의사생활도 지금부터가 진짜 하이라이트다. 이제야말로 본선을 뛰는 선수의 기분이다. 


향후 10년의 절정기중에서도 최절정은 또 이것이다. 


산중독자의 클라이맥스를 이룰 대형 이벤트가 계획돼 있다. "환갑잔치를 에베레스트에서 하려고 합니다. 정말 멋지지 않겠습니까?" 멋진 게 아니라 좀 너무한 건 아닌가. 설령 VIP로 초청을 해준대도 하객들은 못 갈 판이니 부럽다못해 은근히 심통이 나는 심정을 그는 몰라도 너무 모른다. 


정영주 자유기고가 mar10@chollian.net 

김명원 사진부 기자 kmx@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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