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박사님과 또한가지 공통점을 찾았네요...
첫째, 정시퇴근이 없다는 것.....
그리고 환자(?)를 고친후 보람을 느낀다는 것....^^;
물론 고치는 대상은 틀리지만 말이죠....
[인간탐구] 아주대 병원 신경외과 조경기 박사(下)
"일중독에서 나를 지켜준건 산"
화려한 생활은 안중에 없었다. 평생 시골의사를 꿈꾸며 지방도시 원주의 한 병원 인턴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1년만에 쫓겨났다. 사건이 있었다. 당시 진료실에선 환자에게 쓸 거즈도 모자라 난리인데 병원에선 여윳돈이 생기자 진료환경을 개선하는 대신 새 테니스장을 만들기에 바빴다. 어느날 밤 동료들과 술을 마시다 폭발해버렸다. 동료 10명과 함께 갓 단장한 테니스장을 발로 마구 짓밟아놓았다.
다음날 병원이 발칵 뒤집혔다. 주모자라는 이유로 1순위로 잘렸다. 시골의 일반의사로 살겠다던 소박한 계획은 그것으로 끝났다.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에서 전공의 과정을 마치는 동안 뜻밖의 행운을 만났다. 당시 전공의 필수과정인 무의촌 진료 근무지로 지리산 뱀사골을 배정받은 것. 워낙 깊은 산골이라 찾아오는 환자도 없었다. 한국인 최초의 에베레스트 등정을 꿈꾼 것도 그때였다.
매일 10Km씩 구보를 하는 한편 환자가 없는 날은 텅 빈 보건소의 문을 닫아걸고 지리산을 오르내렸다. 의사 대신 전문산악인이 되려고 했다. 의사면허가 있으니 그건 나중에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와중에 고상돈씨의 에베레스트 등정 소식을 방송에서 들었다. 선수를 빼앗겼다고 가슴을 쳤다. 낙담한 채 산악인의 꿈을 포기했다.
미국체류 2년3개월동안 논문 18편 발표
그 후 진료와 공부외엔 한 눈을 팔지 않았다. 1980년 국립서울병원 신경외과 과장으로 근무하면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데 이어 연세대 의대 교수로 있던 1985년 미국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대학 뇌종양연구소 연구원으로 건너갔다.
거기서 그는 한국 '일중독자'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왔다. 2년3개월의 짧은 체류기간 동안 무려 18편의 논문을 쏟아낸 것이다. 석달에 두편 꼴인데, 그것도 모두 국제의학계에 보고된 논문들이다. 쉴틈없이 현장을 찾아다니며 파고든 결과다. 심지어 귀국전날에도 실험실에 있었다.
귀국이삿짐을 꾸리는 일마저 부인에게 맡기고 자신은 논문만 붙들고 있었다. 그 일로 지금까지 약점이 잡혀있다.
이후 전주 예수병원 신경외과 과장, 연세대 의대 교수를 거친 뒤 1994년 현재의 병원으로 적을 옮겼다.
그간 그가 의료계에서 세운 공은 크고도 많다. 1987년 이후 각 일간지 의학면엔 수시로 그의 이름이 올랐다. 수술이 아닌 주사침 흡입으로 디스크를 치료하는 새 수술법 개발, 수술부위를 절제하지 않고 간단한 방사선 캡슐로 치료하는 새 뇌수술법 개발과 뒤이은 첨단 뇌내시경 도입 등. 가장 최근작으로는 '뇌종양 경계 표식자'라는 것을 내놓아 주목을 받았다.
뇌종양의 완전제거를 가능하게 만든, 일종의 아이디어 수술장비다. 현재도 3년째 파킨슨씨병 환자들을 위한 연구중이다. 이 병의 주요인자인 도파민을 체내에서 직접 생성할 수 있는 유전자 개발 연구로 새로운 기대를 모으고 있다.
* 뇌조양 전문의(조경기 박사)
"가끔은 '꼭 생명을 살리는 것만이 최선인가'하는 물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최근 대한의협에서도 안락사, 뇌사, 낙태 등에 대한 법적 공론화 움직임을 보여 논란이 됐지만, 아마도 의사라면 누구나 고민하는 문제일겁니다.
병원에 있다보면 뇌출혈로 응급실에 실려온 환자의 가족들이 처음엔 무조건 '살려달라'고 애원합니다. 하지만 막상 수술로 생명을 건지고도 다시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 소위 '식물인간'이 되면 그땐 수술로 살려놓은 것 자체를 후회합니다.
나중엔 '차라리 그때 왜 죽게 놔두지 않았냐'고 저까지 원망합니다.
그들이 겪는 고통이란 말할 수 없습니다. 현실적인 것만 해도, 당장 한달에 200만원이 넘는 간병인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으며, 가족의 생계는 또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런데 얼마전 모 병원에선 뇌손상 환자를 수술한 뒤 의사가 가족들의 형편을 고려해 퇴원시켰다가 살인죄로 기소돼 지금도 법정 투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안락사에 대해선 뭣보다 환자와 보호자 자신이 너무도 간절히 그것을 원합니다. 아무리 의사로서의 윤리와 책임이 중하다 해도, 결국 병원비를 내거나 고통을 받는 건 그들인데, 현실적으로 아무 도움도 안되는 제3자인 우리가 무조건 살리기만 한다고 능사인가,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회의가 듭니다. 개인적으로도 환자와 보호자의 결정을 존중해주는 것이 온당하리란 생각입니다."
그동안 숱한 죽음도 목격했다. 혼수상태로 실려와 손을 써보기도 전에 숨을 거두는 환자, 1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은 뒤 단 몇 달이라도 더 생명을 늘리기 위해 수술대에 오르는 환자.
그 힘겨운 싸움 끝에 결국 환자가 떠나버리면 의사 역시 심한 속앓이를 한다. 지난 2월엔 특히 그랬다. 어떻게든 살려보려던 한 환자가 어려운 수술에도 불구하고 끝내 숨을 거두자 너무도 허망해 하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생전 처음으로 평일중 휴가를 얻어 제주도로 떠났다. 한라산 설벽에서 자신과 또다른 싸움을 했다. 이틀만에 겨우 마음을 추스리고 돌아와 신문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그와 함께 등반했던 제주도 학생 3명이 눈사태로 죽었다는 기사가 난 것이다. 하늘이 그를 살려준 뜻이 무엇일까?
산에 오르며 자신과의 싸움 수없이 반복
자신조차 '뇌종양'에 걸리기 딱 좋은 그 스트레스를 그나마 견뎌내고 있는 건 산 덕분이다. 산조차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지만, 그 고통속에서 그는 더 강해진다.
5년전부터는 더 큰 위험에 뛰어들었다. 1996년 마나슬루봉에 오른데 이어 지난해엔 K2에 도전했다. 대외적으로는 팀닥터였지만, 사실상 자신과의 대싸움을 치른 산악인이었다.
잔뜩 긴장한 채 도전한 마나슬루봉 등정은 예상보다 순탄했다. 해외원정은 처음이었지만 심한 고소증으로 고생한 것 외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평소 단련시킨 체력덕을 톡톡히 봤다. 해발 7,000m까지 밟은 뒤 정상에는 엄홍길씨만 성공, 계속되는 막판 폭풍 때문에 할 수 없이 전 대원이 철수했다.
돌아오고보니 약이 올랐다. 내내 별렀던 기회는 4년 뒤에 찾아왔다. 마침 의료계 파업기간중 K2 등반대의 팀닥터 제의를 받았다. 장장 50일간의 대장정. 가기전 몰래 유서를 준비했다. 국내에선 받아주는 보험사조차 없어 한 외국 생명보험에 가입해두었다.
그 서류를 유서와 함께 봉투에 넣어 연구실 책상위에 두고 나왔다. 가족에겐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책상위의 서류를 어디어디에 갖다주라'고 출국전 한 간호사에게 언질을 줬다.
구급의료품들과 함께 그가 빠짐없이 챙기는 '필수상비약' 한가지는 술. 원래가 애주가이기도 하지만, 등반중의 술은 약처럼 특별하다. 야영중 추위와 적막감을 견디게 해준다. 술 반입이 금지된 파키스탄에 들어갈 땐 비상수송작전까지 펼쳤다. 공항 검색원들에게 들킬까봐 의약품 상자속에다 몰래 술을 숨겼다. 다행히 무사통과. 항간엔 '링거 병에 넣어온 술도 봤다'는 소문도 있다.
K2는 해발 8,611m. 자신만 남겨두고 떠난 대원들 뒤에서 단독등반을 결심했다. 7,500m의 제4캠프까지 올라가는 5일동안 홀로 빙하에 내던져져 있었다. 등정은 생각보다 엄청나게 어렵고 고통스러웠다. 허술한 인스턴트 밥이나 수프 따위로 대충 허기를 때웠다.
그 죽음의 산을 구태여 찾아올라온 자신이 미쳤다고도 느꼈다. 이따금 그를 찾는 인기척이라곤 '환자가 생겼으니 치료해달라'는 무전기속의 요청뿐이었다.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보다 자기 자신이었다. 제2캠프에선 두 번이나 죽을 뻔 했다.
갑자기 머리위로 바위가 굴러떨어지는가 하면 자일을 고정시킨 바위가 통째로 부서져 내릴 상황이 벌어져 행여 뒤따라 오던 사람이 변을 당할까봐 온 몸으로 자일을 버티고 있었다. 오도가도 못한 채 탈진 직전까지 허공에 매달려 있던 그를 무전기 연락을 받은 동료가 급히 달려와 구해냈다.
"거의 신들린 사람처럼 산에 올랐죠"
"정말 무모한 짓이었지요. 거의 신 들린 사람처럼 올랐습니다. 그렇게까지 고생을 하고도 결국 악천후 때문에 정상을 보지 못하고 온 게 너무도 아쉽습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다음번엔 꼭 해내고 말겁니다."
아는 거라곤 오로지 산과 병원뿐, 그외엔 헛점도 많은 의사다. 수원에 온지 몇해가 지나도록 병원 뒷산은 알아도 수원역이 어딘지, 가까운 은행이 어딘지 모른다. 가족들로부터 '빵점'을 맞은 지도 오래다. 평일의 심야 귀가는 기본이고 주말은 주말대로 배낭째 행방불명이다.
돈에 대해선 더 어둡다. 얼마전엔 휴대폰 요금이 체납됐다며 전화를 끊겠다는 통신회사의 '협박'까지 들었다. 남들은 얼마나 여유있게 사는지, 자기 통장에 돈이 있는지 어떤지도 모르고 산다.
그러다가 얼마전엔 정말 속 터지는 일이 있었다. 지인중 하나가 최근 100만원짜리 쌍꺼풀 수술을 받았다는 얘기를 우연히 듣고 깜짝 놀랐다. 단 30분짜리 쌍꺼풀 수술비가 100만원, 자신은 생명을 건 10여시간짜리 대수술을 하고도 고작 50만원을 받을까 말까라니 약이 바짝 올랐다.
그 참에 개업을 해버릴까도 생각했다. 옛날부터 주윗사람들이 더 종용하던 일이었다. 하지만 잠깐뿐이다. 개업하면 지금보다 10배, 20배 수입이 올라갈 것은 그도 뻔히 알지만, 어릴적 책에서 읽었던 슈바이처가 또다시 발목을 잡는다.
그 대신 그는 요즘 색다른 싸움을 준비하고 있다. 다른 곳에서 추간판제거수술을 받고도 상태가 악화돼 찾아온 한 만성골수염환자를 3차례의 대수술 끝에 어렵사리 호전시켜놓았다.
그런데 그 과정에 쓰인 항생제 비용에 대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측이 그 일부를 인정해주지 않겠다고 나온 것이다. 대략 1,000만원에 해당한다. 전후상황을 설명하자면 너무 복잡하지만, 한마디로 해당 치료법에 대한 전문적 검토없이 진행된 평가 때문에 생긴 오류로 그는 보고 있다.
가뜩이나 진료비 부당청구 문제로 의사들에 대한 시선도 곱지 않고, 상대가 상대니만큼 주위에선 승산이 없을거라며 말리기도 하지만, 그는 '정 말리면 사표까지 쓰겠다'며 소송에 나섰다. 격려는 커녕, 진정한 의사들의 땀까지 마구잡이로 평가절하하는 행정이 그에겐 서운하다못해 화가 난다.
처음엔 난색을 표하던 병원측도 결국 그의 소송을 지원하고 있다.
의사생활은 지금부터가 진짜 하이라이트
나이는 거꾸로 먹어간다. 체력은 아직도 20~30대 수준이다. 수술중 음악을 틀어놓는 것은 조 박사의 트레이드 마크중 하나. 예전엔 클래식만 고집했으나 요즘은 발라드나 트롯까지 섭렵하고 있다.
도무지 정신없게만 보인다던 에어로빅까지 이젠 그의 새벽운동 코스중 최고의 시간이 돼 있다. 한번이라도 거르면 종일 기분이 찌뿌둥해지는 이상한 금단현상까지 생겼다고 한다. 의사생활도 지금부터가 진짜 하이라이트다. 이제야말로 본선을 뛰는 선수의 기분이다.
향후 10년의 절정기중에서도 최절정은 또 이것이다.
산중독자의 클라이맥스를 이룰 대형 이벤트가 계획돼 있다. "환갑잔치를 에베레스트에서 하려고 합니다. 정말 멋지지 않겠습니까?" 멋진 게 아니라 좀 너무한 건 아닌가. 설령 VIP로 초청을 해준대도 하객들은 못 갈 판이니 부럽다못해 은근히 심통이 나는 심정을 그는 몰라도 너무 모른다.
정영주 자유기고가 mar10@chollian.net
김명원 사진부 기자 kmx@hk.co.kr
입력시간 2001/05/02 21:07
*출처: <주간한국>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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