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들의 위대한 일상(?)을 담은 영화 ‘위대한 유산’을 보면 백수들의 가슴을 후벼파는 멘트가 곳곳에 나온다. “돈 못 벌면 처먹지도 마.”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녀. 나다니면 돈 드는데.”
가족들이 이구동성으로 놀고 먹는 식구들을 구박하는 이 대화는, 그냥 웃고 넘기기에는 어딘가 서글픈 구석이 있다. 어쩌면 영화관 한구석 어디에선가, 이 시린 멘트에 가슴에 대못이 박힌 채로 숨어 있는 백수들이 있는 건 아니었을까?
매일 아침 1300만 명의 직장인들이 저마다 일터를 향해 분주하게 걸음을 재촉하고 있는 동안, 젊고 할 일 없는 청년 백수 수십만 명은 이불 속을 헤매거나 눈칫밥을 얻어먹으며 <벼룩시장>을 뒤적이고 있다.
복지병을 걱정하는 유럽에서처럼 한가하게 놀고 먹을 수 있는 처지에 놓인 것도 아니기에 때론 도서관으로, 학원으로 그리고 취업공고판 앞으로 하루종일 뛰어다니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을 원하는 곳은 그리 많지 않다.
청년 실업 백만의 시대가 도래한 요즈음, 가장 활발하게 사회생활을 시작해야 할 그들은 사회에서 박탈당한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한다.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3년 전 사회에 나온 백지상 씨도 거기에 해당한다.
취업이 되지 않기는 그도, 동기들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계속 일자리를 알아보자’ 그렇게 스스로를 다잡았다. 처음 1, 2년 동안은 정말이지 입사 원서를 수도 없이 써 보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는 취직을 하겠다는 의욕마저 상실한 채 남루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도무지 뚫고 들어갈 여지조차 없다는 것이 그가 느낀 가장 큰 절망감. 스스로를 백수라 칭하지만 백수에게도 자존심은 있는 법. 그것마저 지키지 못하면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손수 백수 지침서를 만들기도 한다.
그는 외출할 때 절대로 무릎 나온 후줄근한 면바지는 입지 않는다. 양복과 넥타이를 반드시 갖춰 입은 후 집을 나선다. 그리고 휴대폰은 필수. 심지어 명함도 박았다. 친구나 지인에게 너무 자주 찾아가는 것도 경계한다. 어쩌다 대낮에 집으로 걸려오는 전화는 절대로 받지 않는다. 유난히 바쁜 척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그리 바쁠 일도 없다.
사실 다른 청년 백수의 입장도 그와 다를 바 없다. 가족들에게 스트레스를 덜 주기 위해 거의 매일 집을 나서지만 막상 사람들과 만날 때마다 직함을 물어오는 통에 말문이 막힌다.
세상에 나서면 모든 사람이 ‘백수’라고 손가락질하는 것 같아 점점 더 세상과 벽을 쌓게 된다.
이렇게, 독립할 나이가 됐는데도 부모들로부터 용돈을 받아 쓰며 집에서 놀고있는 20∼30대 청년들의 심각한 현실을 반영하는 통계자료가 나왔다.
노동연구원 발표에 따르면 국내 청년층 유휴 인력은 105만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 취업 의사 없이 그냥 놀고 있는 청년이 72만 명. LG경제연구원은 지난해 3월, 우리나라의 잠재적 ‘기생 독신자(Parasite Single)’ 수가 대략 467만 명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기생 독신자란 성인이 된 후에도 부모에게 얹혀살며 어른 노릇을 못하는 20∼34세 연령층의‘어른 아닌 어른’을 일컫는 말이다.
‘어른 아닌 어른’의 심각성은 그 양태가 청년실업과는 조금 다르다. IMF를 기점으로 서서히 양산되기 시작한 백수 문제가 해를 거듭할수록 어떻게 변모하고 있는가 하면, 심각하게도 ‘부부 백수’를 양산하는 시스템으로 바뀌고 있다. 청년 실업보다 더 심각한 것이 바로 이 백수 부부들이다.
부부 백수. 어느 한쪽에서도 돈을 벌어오지 못하고 소비만 하고 사는 이 특이한 계층.
특이한 계층이라고 못박았지만, 사실 양태가 특이한 것이지 숫적으로 특이하거나 희박하지 않으니 그것이 더 문제다. 주위로 눈을 돌려보면 아주 쉽게, 우리 레이더망에 걸려든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심지어 비싼 돈 들여 대학까지 보내주고, 거기다 본인은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우리가 보기에는 ‘돈도 못 버는 주제에 겉멋만 들어서’인 게 뻔한, ‘돈 내놔’와 ‘못 줘’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부류에 속했던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대학 졸업 후 어영부영 시간을 보낸다. 물론 처음엔 회사에 다닌다 어쩐다 하며 품위 유지 정도는 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자립심이라는 찾아볼 수 없는 이들은 그렇게 나이만 먹어갈 뿐, 경제적으로 자립한 성인이 되지 못한다.
서른 즈음이 되면 결혼을 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에 드디어 굴복한 이들은, 결혼 자금 명목으로 목돈을 받아 드디어 자기만의 보금자리를 꾸민다. 그런데 결혼을 해도 먹고사는 문제는 ‘결혼했다’는 이유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우리 사회 어디에 결혼한 남자라는 이유로 우대하며 취직시켜주는 곳이 있던가? 결국 이들은 어딘가에 얹혀살거나 누군가의 경제력에 의지해 살 수밖에 없게 된다. 실업 수당이니 사회 보장이니 하는 것은 돈 많은 선진국에서나 통용될 말. 결국 만만한 것은 가족이다. 다행이 돈 좀 있는 부모를 둔 이들은 ‘사업 자금’이란 명목으로 손을 내밀기 시작한다.
나이가 들어 어느덧 삼십대 중반. 아이도 한 명쯤 낳아 진정한 가장 대열에 들어서게 된다. 그런데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이렇게 나이가 들고 식구가 늘어나도 도무지 ‘자립심’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는 사실. 게다가 이들은 정신적으로도 미성숙하다.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이들에게 정신적 성숙을 기대하는 것이 무리인 것은 당연지사. 이들은 늘상 누구에겐가 기대고 의지하지 않으면 불안감을 느낀다. 결과는? 가족 모두가 함께 망하는 길에 접어들게 된다는 것이다.
참으로 특이한 것은, 이들의 소비 수준이 백수의 그것이라고 보기에는 터무니없이 높다는 것이다. 이들의 삶을 지탱해주는 것은 ‘언젠가는 성공해 보란 듯이 살겠다’는 야심만만한, 그럼에도 아주 허무한 계획들이다. 그러니 현재의 삶이 비루해서는 안 된다. 소비 사회의 주역답게, 발빠르게 유행에 앞서가고 궁색함을 없애려는 듯 홈쇼핑에서 눈에 들어오는 물건이 있으면 주저 없이 전화기를 든다. 그 뒷감당은 고스란히 가족의 몫으로 돌아온다.
안타까운 것은 이 부부 백수들의 탄생에는 어느 정도 부모들이 일조했다는 사실이다. 사실 이것은 한국 사회가 갖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에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한국이라는 사회는 여전히 전통적인 가족주의가 견고한 시스템으로 작동하고 있다. 부모가 마땅히 자식들에게 해주어야 할 책임과 의무는 상상을 초월한다. 이유는? 부모가 나이가 들어 독립된 생활이 불가능할 때 기댈 곳은 자식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회보장 제도가 아직 잘 갖춰져 있지 않아 늙어서 품위 있게 살 수 있으려면 믿을 것은 자식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말하자면 보험 드는 셈치고 자식에게 투자하는 것인데, 그런데 지금의 문제는 이 투자가 이익실현이 되기는커녕 원금만 까먹는 부실 투자가 될 확률이 훨씬 높다는 데 있다.
연세대 심리학과 황상민 교수는 “경제력을 갖춘 부모가 부족할 것 없이 돌봐주는 상황에서는 자식들이 굳이 자신의 역할을 찾아야 할 필요를 못 느낄 수도 있다”며 “경제·사회적으로 독립된 성인이 되길 미루는 일종의 심리적 ‘모라토리엄(morato rium)’상태에 빠진 계층”으로 이들을 정의 내리기도 했다.
부모의 부를 등에 업고 하루하루를 소비와 유흥에 몰두하는 유한계급형 ‘백수 부부’들은 어떤 면에서 보면 선택받은 이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선택받은 행복은 유한하다. 부모의 지원이 평생 동안 계속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부모도 늙어 병들면 언젠가 자식 곁을 떠나야 한다. 자립심 없이 홀로 남겨진 이들의 삶이 온전할 리 없다. 결국 부부 백수는, 사회적 낙오자가 되어 그 책임을 고스란히 사회에 떠넘기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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